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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심히 가르치는 만큼 아이의 두뇌는 망가진다! – 자녀의 두뇌 발달 망치기 프로젝트

교육의 방법 중 가장 보편화된 방법은 훈육과 가르침이다. 학교에서는 교사가 학생을 가르치고, 집에서는 부모가 자녀를 가르친다. 이런 형태의 교육이 만연하다 보니 많은 부모가 자녀를 가르쳐야 한다는 생각을 강하게 가지고 있다. 그런데 이런 접근법이 실제로는 아이의 두뇌를 망치고 있다는 걸 인지하는 부모나 교육자는 많지 않아 보인다.

가르침에는 조건이 있다. 가르치는 대상이 이미 많은 걸 알고 있다면, 또 모든 걸 잘하고 있다면 가르칠 이유가 없다. 이 말을 뒤집어서 생각해보면 가르침의 이면에는 배우는 사람이 ‘모른다’, ‘잘하지 못한다’라는 전제가 깔려있다. 따라서 가르치려 하면 할수록 가르치는 사람에게 배우는 사람은 ‘잘하지 못하는 아이’ 또는 ‘바보’로 보일 수밖에 없다. 만일 가르치는 대상이 나와 피를 나누지 않은 학생이라면 가르치는 나는 권위가 선다. 학생을 가르칠 수 있는 능력이 있고 또 학생을 평가할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대상이 내 아이라면 어떨까?

아이를 가르치면 가르칠수록 부모의 무의식에 아이의 단점만 강하게 자리 잡을 수 있다. 아이를 가르칠 대상으로 본다는 말 자체가 가진 의미가 ‘내 아이는 지식이 없는 아이’, ‘가르치지 않으면 안 되는 아이’, ‘아는 게 없는 아이’라는 인식이 쌓여가기 때문이다. 즉 지식을 가르치려 할수록 부모에게 아이는 바보가 된다는 뜻이다. 나이가 들어 성인이 된 자식도 부모에게는 아이처럼 보이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가르칠 대상으로 생각하며 살아온 세월이 있다 보니 성인이 된 자식도 성인이 아닌 부족한 아이로 보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문제는 부모의 무의식에서 끝나지 않는다. 

가르침의 대상이 된 아이는 어떨까? 부모가 가르치려 시도하면 할수록 아이는 자존감을 잃어간다. 앞서 설명한 것처럼 가르침의 기본 조건은 가르침의 대상이 아는 것이 없는 상태라는 점이다. 따라서 배우면 배울수록 그 사람은 점차 자기의 자존감을 잃어간다. 아는 것이 없는 무식한 사람으로 취급받는데 자존감이 생긴다면 오히려 그게 더 이상한 현상이다. 그래서 훈육을 비롯한 지식을 가르치는 모든 교육은 상하관계를 견고히 하고, 배우는 사람을 가르치는 사람의 정신적 노예로 전락시키며, 나아가 스스로 삶을 만들어 나가는 능력의 싹을 자르는 역할을 한다. 지식을 가르치는 교육은 따라서 지식을 배우고 익혀 때가 되면 부모를 떠나 독립한 후 부모와의 관계 또한 남남으로 대하는 동물의 삶에 적합한 것이지 인간에게 적용될 교육이 아니다. 그런데 여기까지는 배우는 사람이 수동적으로 따를 때의 이야기다. 가르치는 사람이야 지식을 가르치는 것 외에는 다른 방법이 없어 이렇게 교육한다고 볼 수 있지만, 진짜 문제는 배우는 처지에서 이를 어떻게 받아들이는 지에 따라 상황은 극과 극으로 나뉠 수 있다. 

‘바보’ 취급받는 상황을 좋아할 사람은 없을 것이다. 아이라고 예외는 아니다. 아는 게 없는 무식한 아이 취급을 받으면서도 좋아할 아이는 없다. 훈육과 가르침은 배우는 사람의 무의식 세계에 ‘나는 바보다!’라는 인식을 뿌리를 깊게 새긴다. 훈육도 여기에 해당한다. 그래서 모든 아이들이 이런 일방적 훈육과 가르침을 받아들이지는 않는다. 아이의 사회성에 따라 반응이 달라지기 때문이다. 

사회성은 사회의 일원이 될 수 있는 훈련 과정의 도구다. 군인이 군인으로서의 역할을 하기 위해서는 훈련의 과정을 통해 배우고 익히는 사회성이 필요하다. 만일 군인의 역할에 관한 생각이 다르다면 이는 군인으로는 적합한 사람의 모습이 아니다. 군대에서의 역할을 받아들이지 못하므로 소위 말하는 ‘고문관’이 된다. 이와 비슷하게 가르쳐도 배우지 못하는 아이는 가정을 비롯해 아이가 속한 사회로부터 소외당하게 된다. 소외당하는 상황에서 아이들은 어떻게 반응할까? 

사회로부터 소외당하는 아이들에게 주어지는 길은 몇 가지 없다. 외톨이의 삶을 받아들이고 조용히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살아가던가, 아니면 자신의 존재를 어떻게든 드러내려는 절규하기도 한다. 이 두 가지 방향 중 어느 쪽도 쉬운 게 없다. 외톨이의 삶은 군대의 고문관처럼 사회가 그냥 두지 않는다. 괴롭힘의 대상이 되기 때문이다. 반대로 자신의 존재를 드러내려 하면 방법은 정해져 있다. 반항하고 싸우고 대드는 방법이다. 두 가지 형태 모두 당사자로서는 쉽지 않은 상황이다.

괴롭힘의 대상이 되면 학교 폭력의 희생자가 될 수 있다. 반대로 폭력을 행사하면 문제아로 낙인찍힌다. 폭력의 희생자로서 살아가는 삶은 설명하지 않아도 쉽게 짐작할 수 있다. 따라서 폭력을 행사하는 경우만 가지고 생각해 보자. 반항심으로 주먹을 휘두르는 경우는 통제도 어렵고 예측도 쉽지 않다. 문제는 이런 반항과 폭력이 만성화 되는 경우다.

반항이 심해지면서 폭력으로 옮겨가기 시작하면 가정과 학교는 아이를 문제아로 낙인찍고 고칠 방법을 찾는다. 그런데 이런 접근법이 때로는 폭력을 더 부추기는 경우가 있다. 폭력의 뿌리를 찾아 해결하기보다는 눈앞의 문제를 해결하려 하기 때문이다. 이런 상황에서 아이가 또 다른 탈출구를 찾으면 문제는 더 심각해진다. 

폭력을 행사하는 건 당하는 쪽도 힘들지만, 휘두르는 당사자도 힘든 과정이다. 항상 화와 짜증에 갇혀 있기 때문이다. 인간의 삶에서 즐거움이 없으면 살아가 의미를 찾지 못한다. 그래서 탈출구를 만든다. 바로 폭력을 통한 만족 또는 희열이다. 짜증과 화를 못 이겨 폭력을 쓰다가 점차 폭력을 통해 만족과 희열을 느끼는 형태로 변화하면 되돌리는 과정은 쉽지 않다. 즐기는 사람을 이기기 어렵기 때문이다. 

폭력과 반항을 우회하는 교육 PonderEd Education (http://kr.PonderEd.ca)