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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I를 이용한 부정행위, 학생이 문제일까? – AI가 변화시킬 인류의 삶

AI를 이용한 부정행위, 학생이 문제일까? – AI가 변화시킬 인류의 삶

부정행위는 생소한 단어가 아니다. 가르치는 사람은 학생의 부정행위를 적발하고자 감시하고, 부정행위를 시도하는 학생은 교사/교수의 눈을 피해 정답을 찾는다. 왜 이런 일이 벌어질까? 이유는 하나다. 높은 성적을 받기 위함이다. 그러면 또다시 질문해 본다. 왜 높은 성적을 받아야 할까? 성적이 인생을 결정하기 때문일까? 이렇게 단순하게 생각하기에는 뭔가 부족하다.

부정행위를 통해서라도 높은 성적을 받고자 하는 욕망은 어디서 오는 걸까? 이 질문에 대한 답은 사회를 보면 알 수 있다. 사회는 어떤 분야든 상위권에 속한 사람을 인정하고 우러러본다. 운동이든, 사업이든, 공부든 분야에 상관없이 우수해야 인정받는다. 심지어는 도둑 중의 1등을 ‘대도’라는 이름을 붙여 기억하기도 한다. 왜 이렇게 인간은 1등에 집착하는 걸까? 이에 대한 답은 인간이 아닌 동물의 세계를 살펴보면 답이 나온다.

인간처럼 사회를 이루어 살아가는 동물의 세계에서는 1등이 모든 권한을 가진다. 무엇이든 뺏을 수 있는 권리, 번식의 권리 등 말 그대로 모든 걸 차지한다. 2등은 1등의 자리를 노릴 수 있는 위치이기는 하지만 1등이 존재하는 한 권리를 행사할 수 없다. 즉, 1등에 집착하는 모습은 인간이 아니라 동물의 세계라는 뜻이다. 그런데 AI를 이용해 부정행위를 해서라도 높은 성적을 받겠다는 이런 동물적 욕구가 소위 말하는 일류 대학에서 벌어지는 이유는 뭘까? 동물과는 다르다는 인간에게 왜 1등을 차지하고자 하는 욕구가 여전히 존재하며, 이 욕구를 채우기 위해 부정행위도 불사하는 이유가 뭘까? 

인간의 두뇌는 논리적 사고가 가능한 기능을 가지고 있다. 반면 동물은 논리적 사고가 아닌 생존과 번식을 향한 집착이 강한 두뇌를 가지고 있다. 앞서 언급한 것처럼 생존과 번식에서는 1등이 모든 걸 차지한다. 그래서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이겨야 한다. 때로는 상대가 힘이 빠졌을 때를 기다려 싸워 이기고, 때로는 상대를 속여 원하는 걸 얻는다. 부정행위는 바로 이런 맥락에서 이루어진다. 어떤 수단을 동원해서라도 생존하고 이기고자 하는 동물적 욕망이다. 논리적 사고의 발달을 지향한다는 대학에서 공부하는 학생이 왜 이렇게 동물적 욕망에 눈이 멀어 부정행위를 하는 걸까? 그 이유는 바로 교육 자체에 있다.

현재의 교육은 논리적 사고의 발달이 가능한 체계적인 두뇌 훈련을 제공하지 못한다. 물론 가끔 ‘정의란 무엇인가?’로 유명한 하버드 대학의 마이클 샌델 교수처럼 학생의 비판적 사고를 자극하는 수업을 하는 사람이 있기는 하다. 하지만, 이 사람도 생각하는 방법을 단계별로 가르치지 못한다. 그저 논쟁을 통해 서로 싸우는 과정에서 논리적 사고가 조금 더 발달할 수 있도록 조건을 제시하는 정도에 그친다. 가르치는 사람이 논리적 사고가 발달할 수 있도록 가르치지 못하는 상황에서 학생은 무엇을 위해 공부해야 하는 걸까? 답은 ‘성적’ 말고는 없다. 상황이 이러니 높은 성적을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경우가 발생한다.

부정행위를 통해서라도 성적을 높게 받겠다는 학생의 욕구는 논리적 사고력을 체계적으로 키워줄 수 없는 교육에 그 뿌리가 있다. 논리적 사고는 인간의 고유한 두뇌 기능이다. 논리적 사고를 기반으로 형성되는 사회는 경쟁에서 이긴 자가 모든 걸 차지하는 사회가 아니다. 사고력의 차이를 서로 비교하고, 나보다 발달한 논리적 사고력을 지닌 사람이 있다면 인정하고, 그 사람을 거울삼아 나를 더 발전시킨다. 내가 가진 사고력이 타인보다 뛰어나면, 그 사람들이 나를 통해 지혜를 얻고 나아가 나와 같은 사고력을 가질 수 있도록 노력하는 길로 안내한다. 이렇게 인간 사회는 더 많은 권력과 더 많은 재력, 인기 등을 가지겠다고 발버둥 치는 동물적 사회와는 완전히 다른 사회다. 하지만 문제는 인간 사회의 바탕이 되는 사고력을 가르칠 방법이 없어 동물을 길들이는 방법으로 교육을 한다는 점이다.

지식을 전달하는 교육은 동물을 훈련시키는 교육이다. 보여주고 따라 하도록 유도하고, 반복 훈련시킨다. 수학 문제 풀이 방법을 보여주고, 문제를 바꿔가며 훈련하는 교육은 마약을 숨겨두고 조건을 바꿔가며 개가 마약을 탐지하도록 반복해 훈련시키는 것과 다르지 않다. 이렇게 동물을 길들이는 훈련 방법으로 학생을 교육하니 1등을 차지하고자 하는 욕망이 강해질 수밖에 없다. 이런 교육의 현실에 AI의 등장은 실제로 교육의 문제를 적나라하게 드러내고 있다.

이런 질문을 해 보자. 대학의 교수와 AI 중 어느 쪽의 지식이 더 다양하고 정확할까? 아날로그 방식으로 정보를 처리하고 저장하는 교수의 두뇌일까? 아니면 디지털로 빠르고 정확하게 정보를 처리하고 저장하는 AI일까? 답은 이미 나와 있다. 만일 교수가 제시한 시험문제가 AI로서는 접근할 수 없는 영역의 문제였다면, 학생들이 AI를 이용해 부정행위를 할 수 없기 때문이다. AI를 이용한 부정행위로 높은 성적을 받을 수 있다는 말은 문제를 낸 교수의 수준이 AI를 벗어나지 못했다는 뜻이다. 상황이 이런데 차라리 AI에게 교육을 맡기는 게 더 효율적이지 않을까?

AI는 도구다. 이런 도구에 의존해 성적을 받아 살아가는 삶에 인간의 가치가 존재한다고 볼 수는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현 상황은 소위 일류 대학의 교수도, 높은 성적으로 일류대학에 진학한 학생도 AI에 갇힌 삶을 살아가고 있다. 인간으로서의 가치가 사라져가고 있다는 뜻이다.

AI는 스스로 생각하는 두뇌가 아니라 문제가 주어졌을 때 답을 주는 기계다. 이 기계로 인해 인류는 두 가지 형태의 삶으로 나뉠 걸로 보인다. 하나는 AI가 계획하고 명령하는 대로 실행하는 삶이다. 지금까지 대학은 사회에 인재를 공급해 왔다. 사회가 반도체에 대한 지식을 가진 사람을 필요로 하면 반도체에 대한 지식을 갖춘 학생을 배출했다. 하지만 이제는 더 많고 정확한 지식을 가진 AI가 있으니 이런 학생이 필요 없다. 필요한 사람은 오히려 AI의 통제를 받아 일을 수행하는 사람이다. 한 마디로 AI의 노예로서 그리고 공장의 생산 라인 속 부품과 같은 삶을 살아가게 된다는 뜻이다.

AI로 인해 나뉘는 또 다른 인류는 AI를 부리는 인류다. AI는 새로운 지식을 밝히거나 창조할 수 없다. 누군가 새로운 지식을 발견하거나 창조해 입력을 시켜 훈련하도록 만들어야 AI 또한 기계들 사이의 경쟁에서 앞서나갈 수 있기 때문이다. 문제는 현재 모든 교육 분야에서 새로운 지식의 발견이나 창조에 필요한 사고력을 체계적으로 가르치는 교육 기관이 PonderEd Education(http://kr.PonderEd.ca)외에는 존재하지 않다는 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