콘텐츠로 건너뛰기

행복을 꿈꾸는 이들에게

많은 사람이 행복을 꿈꾼다. 아니, ‘많은’이라는 표현보다 모든 사람이라고 해도 될 정도로 사람들은 행복을 꿈꾼다. 그래서인지 행복도 배울 수 있다고 주장하는 단체도 있다. 행복할 권리를 주장하는 사람들도 있다. 나아가 사회는 각 개인이 얼마나 행복한지를 측정함으로써 그 사회의 발전 정도를 평가하기도 한다. 이러한 현상은 역으로 행복한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이 많지 않다는 것을 반증하는 것은 아닐까? 행복이 무엇이고 어디서 오기에 사람들은 행복을 갈망하는 것일까? 

인간의 삶에는 여러 종류가 있다. 석가모니나 예수처럼 가진 것이 없어도 사람들 사이를 누비며 지혜를 가르쳤던 이들, 아이작 뉴턴이나 알버트 아인슈타인처럼 자연 현상을 탐구하는 삶을 살았던 사람들, 스티브 잡스처럼 새로운 제품을 만들어 세상을 놀라게 했던 사람들이 있다. 반면 사람에 따라서는 논리적 사고가 아닌 좋고 나쁨과 같은 감정적 판단에 의존해 도박과도 같은 삶을 살아가는 이들도 있고, 원하는 욕망을 채우고자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행동하다가 사회적으로 비난을 받는 삶을 살아가는 이들도 있다. 이렇게 사람들은 다양한 삶을 살아간다. 이러한 삶의 차이는 어디에서 오는 것일까?

삶의 차이는 두뇌의 작용에 따라 결정된다. 두뇌 능력의 차이가 삶의 차이를 가져온다는 뜻이다. 그렇다면 행복을 꿈꾸는 삶은 어느 쪽일까? 가진 것 없이 떠돌며 사람들에게 지혜를 가르친 삶일까? 지혜를 가르치는 삶을 행복하다고 보기는 어렵다. 가르치는 사람은 지혜를 쌓는 방법만을 가르치고, 그것을 닦아 나가는지의 여부는 배운 사람에게 달려있으니, 성취감을 통한 행복은 배워 익히는 자의 몫이기 때문이다. 그러면 자연 현상에 대해 새로운 이론을 창조하는 삶이 행복한 삶일까? 상대성 이론이 아직 완전하게 증명된 것이 아니라는 점을 생각하면 이론을 만들었다고 해서 따로 얻을 수 있는 성취감이 없다. 상이라도 받으면 그것으로 행복할 수는 있겠지만, 자연 현상을 분석하면서 이론을 만드는 과정에는 행복이 있을 수 없다. 그렇다면 새로운 제품을 생각하고 만들어 나가는 과정이 행복일까? 물론 새 제품이 출시되고 또 잘 팔리면 그 결과에 행복을 느낄 수는 있겠지만, 새로운 제품을 만들어 가는 과정을 행복으로 표현할 수는 없다. 일에 중독되었으며 동시에 괴짜로 알려진 잡스의 삶이 말해주는 것처럼 말이다. 행복은 언제 어떻게 인간에게 다가오는 것일까?

행복은 결과가 있어야 느낄 수 있는 감정이다. 또 결과가 있으려면 과정이 있어야 한다. 사자가 사냥감을 잡아 배를 채운 후 편하게 누워 놀거나 자고 있으면 행복하다는 단어로 표현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따라서 행복이라는 감정은 원하는 목표의 성취와 함께 다가온다. 달리 말하자면 행복은 쟁취하는 것이지 다가오는 것이 아니라는 뜻이다. 그런데 행복을 쟁취하지 않고 얻으려는 사람들이 있다.

가수의 공연을 보았기 때문에 행복한 사람들, 연극을 보고 난 후 만족해서 행복한 사람들, 이런 경우가 행복을 쟁취하지 않고 얻으려는 경우다. 물론 표를 구하지 못해 전쟁과도 같은 경쟁을 하는 경우에는 표를 구했다는 성취감이 있겠지만, 공연을 본 후의 행복감은 공연을 한 사람들이 나를 행복하게 만들어 준 것이기 때문에 쟁취해서 얻은 행복이 아니라는 말이다. 이것이 뜻하는 바는 무엇일까? 이렇게 내가 행복을 쟁취하지 못하는 나는 나를 행복하게 해 주는 사람들의 노예로 전락한다. 그래서 가수들에게 선물 공세를 펼치거나 우러러보며 우상화한다. 그들의 말이라면 무엇이든 믿고 따른다. 특히 대상이 종교 지도자나 권력자 또는 재력가인 경우 더욱 그러하다.

앞서 인간은 삶은 두뇌를 사용하는 방법에 따라 달라진다고 했다. 가수와 같은 사람들은 생각을 통해 공연을 구상하고 그 구상에 따라 피땀 흘려가며 노력한다. 따라서 공연하면서 즐겁고 행복할 수 있다. 이때의 행복은 그들이 쟁취한 것이다. 그런데 관객은 뭘까? 공연을 하는 사람들 경기를 뛰는 선수들이 보여주는 것에 만족하고 행복해한다. 그런데 이 과정에는 생각이 없다. 말 그대로 아무 생각 없이 즐기며 행복을 느낀다. 한마디로 두뇌가 비었다는 말이다.

생각하지 않으면 그 순간이 편해지고, 편해지면 두뇌가 비게 되며, 두뇌가 비면 쉽게 퇴화한다. 치매로 직행할 수 있다는 말이다. 두뇌도 근육과 같아 사용하지 않으면 퇴화한다. 그런데 두뇌의 퇴화는 근육의 퇴화보다 빠르다. 근육은 조직들이 모두 단단하게 연결되어 있지만 두뇌는 신경세포들이 서로 연결이 되어있지 않아 신경 전달물질을 주고받아야만 작동한다. 그러니 삶에서 생각이 없이 누군가가 나를 행복하게 해 주길 바라는 경우가 성취를 통해 행복을 쟁취하는 경우보다 많으면 두뇌는 퇴화의 길로 접어든다. 사용하지 않는 때가 더 많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러한 현상은 비단 예체능 분야에만 해당하지 않는다. 종교 지도자라는 사람들을 통해 배워서 행복하기를 바라는 사람들도 마찬가지다. 

그렇다고 행복을 쟁취하고자 타인에게 해를 끼치면 어떨까? 성적 욕망을 주체하지 못해 성폭행을 저지르고, 물욕 권력욕에 눈이 멀어 타인을 공격하는 것은 어떨까? 이러한 삶은 동물의 삶이지 인간의 삶이라고 볼 수 없다. 인간의 두뇌가 생각하는 능력을 갖추고 있는 이유는 인과의 법칙을 이해하고 논리적인 결론을 도출하기 위함이지 단순히 동물들처럼 눈앞의 욕망을 채우고자 함이 아니다.

행복을 추구하는 삶은 힘들고 괴로울 수 있다. 목표의 성취를 위해 경쟁을 하는 과정이 쉬울 수 없다. 그래서 삶은 고통일 수 있다. 하지만 고통이 꼭 불행을 뜻하는 것은 아니다. 목표를 향해 나아가는 과정은 힘이 들지만, 인간의 두뇌는 그 과정을 즐길 수 있는 능력을 갖추고 있다. 다만 그 능력을 사용하는 방법을 몰라 힘들고 괴로워한다. 지금까지는 그러한 방법을 가르쳐 주는 교육이 없었으니, 목표 성취 과정에서 느끼는 고통만이 두드러지게 보이는 것도 당연할 수 있다. 어쩌면 그래서 많은 이들이 힘들이지 않고 행복을 얻고자 갈망하는 것일 수도 있다.

목표를 성취하는 삶을 즐길 수 있으려면 두뇌를 능동적으로 사용할 수 있어야 한다. 그래야 과정도 즐길 수 있다. 육체적으로는 힘이 들어도 정신적으로는 자유와 즐거움을 느낄 수 있는 삶, 이러한 삶을 위해서는 두뇌가 발달할 수 있도록 생각하는 방법을 익혀야 한다. 이제부터 타인이, 물질이, 권력이 나를 행복하게 해 주길 바라지 말고 두뇌 발달에 힘써보는 것은 어떨까?

PonderEd – 행복, 그 이상의 즐거움과 편안함을 찾아가는 방법을 제공하는 교육