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에게는 다양한 삶이 있다. 어떤 사람은 성공을 향해 쉬지 않고 달리고, 누군가는 소유하는 것에 의미 없다며 무상을 이야기한다. 사람에 따라서는 결혼과 출산이 삶의 의미라 주장하고, 다른 이는 홀로 살아가는 삶을 즐기겠다고 이야기한다. 이런 다양한 삶이 있지만 공통적인 건 말 그대로 ‘살아야지’라며 살아가는 모습이 아닐까 한다. 살아가는 모습을 비춰 인간에게 산다는 게 무엇인지 그 뜻을 찾으려 해도 답은 보이지 않는다. 모든 권력을 쥐었기에 부러울 게 없었던 황제의 자리에 오른 이들이 영원한 삶을 위해 불로초를 찾았다는 이야기는 살아야 하는 이유를 설명해 주지 못한다. 충분히 누리고 넘칠 만큼 가졌으면 삶의 집착도 없을 것 같은데 현실은 반대이기 때문이다. 또 힘들고 지친 나날을 보내는 사람도 살아가기 위해 고통을 참고 견딘다. 딱히 누릴 것도 없고 하루하루가 고통임에도 살기 위해 움직인다. 권력, 재력, 지적 능력, 인기 등 모든 것을 초월해 인간이 공통으로 던지는 질문이 ‘왜 살아야 할까?’ 또는 ‘인간은 무엇을 위해 살아가는 걸까?’로 보인다.
인간에게 삶의 의미는 뭘까? 시간이 흐를수록 희망이 현실화되기 어려움을 깨닫고, 막연한 기대가 무너지는 순간들이 더 많은 게 삶인데, 인간은 무엇을 위해 살아가는 걸까? 살아가는 이유를 묻는 이런 질문이 절실해 보이는 이유는 그 답을 찾지 못하기 때문으로 보인다. 그래서 다시 묻는다. 왜 살아야 하는 걸까? 인간이 살아가는 삶에 의미가 있을까? 인간의 삶에 의미가 있다면 무엇일까?
인간의 삶에서 의미를 찾지 못하는 이유는 아직 두뇌가 동물적 두뇌에 갇혀있기 때문이다. 황제가 불로초를 찾았던 모습은 재력이나 권력 등의 동물적 욕구의 만족이 결코 인간의 삶을 대변해 주지 않음을 반영한다. 편안한 의자에 앉아 손만 까딱하면 수발드는 사람들이 산해진미를 대령하고, 말 한마디만 하면 수고스럽게 움직이지 않아도 많은 게 해결되는 부유층의 삶은 가지지 못한 사람들의 부러움을 살 수는 있지만, 그 자체가 인간으로 살아가는 삶이 아니기 때문에 욕구는 채워지지 않는다. 그래서 삶은 또 다른 새로움을 향한 욕망으로 채워지고 그럴수록 삶에 대한 집착도 더 커질 수밖에 없다.
욕망은 인간을 동물적 본능에 가둔다. 동물적 본능에 갇히면 더 많은 재산을 원하고, 권력을 휘두르며, 자기의 사회적 위치를 잃을까 두려워 더 강한 권력을 찾는다. 동물과 다르지 않은 삶이다.
인간 삶의 가치는 눈에 보이는 권력이나 인기 또는 재물에 있지 않다. 가진 지식의 양도 인간의 삶을 대변해 주지 않는다. 인간으로서 살아가는 이유는 소유의 정도에 따라 구속하고 구속되는 범주를 넘어선다. 말 그대로 삶의 자유를 완성하는 게 인간이 살아가는 진정한 이유라고 할 수 있다.
욕구 충족을 위해 살아가는 삶은 동물의 삶이다. 따라서 이런 욕구나 욕심에서 벗어나야 한다. 또한 나를 정신적으로 구속하는 모든 것에서 자유로워져야 한다. 그래야 동물적 삶에서 벗어나 진정한 인간으로 살아가는 삶의 의미를 찾을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