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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울뿐인 대승불교라는 이름

대승불교는 많은 중생을 제도하는 데 목적을 둔 불교라고 알려졌다. 말 그대로 많은 사람을 계몽하기 위한 종교라는 뜻이다. 그래서 불교 중에서도 대중에 가장 가깝지 않을까 생각한다. 그런데 이렇게 생각해 보자. 누가 누구를 제도 또는 계몽할 수 있을까? 제도 또는 계몽할 수 있는 사람의 자격은 누가 부여하는 걸까? 

이 세상에 타인을 제도하거나 계몽할 자격을 갖춘 사람이 있을까? 세 살짜리 아이에게서도 배울게 있다는 옛 이야기를 생각해보면, 나이가 들었다고 감히 누구를 가르칠 수 없어야 정상이다. 그런데 석가모니의 가르침에서는 왜 ‘대승’이라는 이야기가 나오는 걸까? 이유는 하나가 아닐까 한다. ‘대승’이라는 말은 석가모니가 한 이야기가 아니라 석가모니의 가르침을 배우고 익히고자 했지만, 실제 석가모니가 전하는 방법으로 삶의 완성을 이루지 못한 사람이, 말로라도 일반 사람을 현혹해 자신의 이득을 채우기 위해 사용했을 가능성이 높다는 생각이다. 예와 함께 조금 더 생각해 보자.

누군가 물에 빠졌다고 가정하자. 물에 빠진 사람을 구하겠다고 물에 제대로 뜨지도 못하는 사람이 뛰어들면 어떤 현상이 벌어질까? 산에 고립된 사람이 있는데, 등산이나 구조에 대한 경험이 없는 사람이 무작정 사람을 구하겠다고 뛰어들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 답은 뻔하다. 운이 좋으면 사람을 구하겠지만, 그렇지 않으면 문제에 문제를 더하는 꼴이 되어 버린다. 이런 상태가 되면, 실제 구조를 담당하는 전문가에게는 오히려 짐이 하나 더 늘어나 버린다. 구조해야할 대상이 늘어나기 때문이다.

대승이라는 말처럼 타인을 제도하려면 그만한 능력이 있어야 한다. ‘손가락으로 달을 보라고 가리키는 데, 손가락만 본다!’라며 배우는 사람의 능력을 탓하는 수준으로는 대승을 이룰 수 없다. 석가모니가 사람을 제도했을까? 아니면 석가모니는 길을 묻는 사람에게 길을 안내했고 그 길을 간 사람은 길을 물은 사람 본인이었을까? 

한 사람에게 삶의 완성을 이룰 수 있는 방법을 전하고, 그 방법으로 삶의 완성을 이룬 사람이 또 다른 사람에게 그 방법을 전한다면, 그리고 그 방법이 퍼지고 퍼진다면, 그게 곧 대승이 아닐까? 타인에게 손가락만 본다고 탓하기 전에, 자기 자신부터 진정한 달을 볼 수 있어야 하는 건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