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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뇌와 사회

사회의 양극화가 심해진다고 한다. 경제를 비롯한 사회의 모든 면에서 극과 극을 향한다는 뜻이다. 이렇게 양극으로 향하는 사회의 미래는 그리 밝지 않다고 전망한다. 아래에서 위로 올라가는 길이 좁아지고 있으니 당연하다. 물의 흐름이 막히면 물은 썩게 되고 또 좁은 장소에 물이 모여 양이 늘면 언젠가는 그 물이 넘쳐 주변을 휩쓸고 지나가기 때문이다. 급격한 변화가 다가오니 미래가 밝지 않아 보이는 건 어쩌면 당연할 수 있다. 그런데 정말 사회의 미래가 밝지 않기만 하는 걸까? 꼭 이렇게 보기는 어렵다. 현재 유지되는 사회는 붕괴할 수 있지만, 폐허에서 꽃이 다시 피듯, 무너진 사회는 또 다른 새로운 사회 형성의 밑거름이 된다. 즉, 기회의 땅으로 바뀔 수 있다는 뜻이다. 여기까지는 동물적 본능인 사회성에 바탕을 두고 가정하는 미래다. 

인간에게는 미래를 바꿀 수 있도록 생각할 수 있는 두뇌가 있다. 문제는 인간의 두뇌가 동물적 사회성과 이성적 두뇌 능력을 동시에 지니고 있는데, 이성적 두뇌 능력의 활성이 어려운 상태에서 동물적 사회성에 의존해 살아가는 사람들이 많으면 사회는 번창과 붕괴의 과정을 반복하게 된다는 점이다. 그나마 이성적 두뇌 능력을 발휘할 수 있는 몇 안 되는 사람의 노력으로 인해 붕괴의 시점을 늦추고 있을 뿐이다. 달리 말하자면, 동물적 본능에 이끌리는 사람이 많을수록 양극화는 심해지고, 사회는 빠르게 붕괴의 길로 접어들게 된다는 뜻이다. 생각을 통해 사회를 유지하기보다는 눈앞의 이득을 추구하는 사람이 많으니 당연한 결과다. 특히 사회의 우두머리(두뇌 능력을 갖춘 지도자가 아닌 본능에 충실한 권력자를 뜻함)에 따라 양극화는 더 촉진된다. 우두머리가 술과 여흥에 취해 있으면 생각하는 능력이 부족한 사회 구성원이 이런 분위기에 휩싸여 함께 본능적이 되어 음주운전 등 사회문제를 많이 일으키기 때문이다.

인류의 역사는 몇 안 되는 생각하는 두뇌 능력을 갖춘 사람들이 변화시켜 왔다. 자연 현상을 과학적으로 설명하고 그 원리를 찾아 설명한 사람이 과학과 기술의 발전을 이끌었고, 인간의 삶을 고찰하고 해석한 사람이 철학이라는 분야를 만들고 이끌어 왔다. 물론 인류에게 과학과 기술의 발전으로 인해 전쟁에 휩싸여 무너지는 시기가 있었지만, 그때마다 새로운 형태의 사회가 만들 수 있었다. 사회가 붕괴하는 원인을 찾고 분석하는 과정에서 삶의 진정한 가치를 고민하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여전히 문제가 있다. 앞서 적은 것처럼, 이런 고민을 통해 해결책을 찾아가는 사람의 수가 제한적이라는 점이다. 왜 그 수가 적을까?

지식을 배우고 익혀 원하는 것을 쟁취하는 두뇌는 동물에게도 있다. 지식은 곧 도구이다 보니 알고 있는 것이 많을수록 생존에 유리한 것도 사실이다. 인간도 생존이 가장 우선하는 존재의 목적이기 때문에 지식을 중요하게 여긴다. 빠르게 지식을 배우고 익혀 현실에 적용할 수 있어야 생존에 유리하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외과 의사는 수술에 관한 도구와 도구의 사용 방법에 대한 지식이 충분해야 빠르고 정확하게 수술을 할 수 있고, 법관은 법의 적용과 판단에 대한 지식이 많아야 빠르고 정확하게 판단을 내릴 수 있기 때문이다. 문제는 이런 지식과 기술이 사회의 양극화를 가속화 시키는 역할을 한다는 점이다. 지식과 기술은 누군가가 찾아 놓았을 때 배우고 익힐 수 있지 스스로 만든 게 아니기 때문에 가진 자에게는 더 많은 기회가 주어지고 그렇지 않은 사람에게는 반대로 주어진 기회조차 잃도록 만들기 때문이다. 

지식은 누군가 찾거나 만들었기 때문에 존재한다. 누군가 수술 방법을 찾아 놓았기 때문에 수술에 대한 지식과 기술이 존재한다. 누군가 근거와 논리를 가지고 법적인 판단을 내렸기 때문에 법에 대한 지식과 기술이 존재한다. 즉, 배우고 익힌 방법으로 수술하고, 지금까지 내려진 법적인 테두리 안에서 판단하고 적용하는 건 지식과 기술을 배우고 익히는 두뇌만 있으면 가능한 ‘기술’의 영역이다. 하지만 이 ‘기술’을 많은 사람이 인간의 고유한 두뇌 기능이라고 착각한다. 그래서 교육도 지식과 기술의 전달에 집중한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지식과 기술에 초점을 맞춘 교육이 모든 사회 문제의 시작이라는 점을 인지하면서도 애써 외면한다.

지식과 기술의 전달과 습득에 매달리는 교육은 모든 사회 문제의 뿌리다. 그중에서 사회의 양극화에 대해 생각해 보자. 법에 대한 지식이 많아 그 지식을 도구로 자기가 원하는 걸 얻는 데 사용하면, 그로 인해 피해를 보는 사람이 발생한다. 원하는 걸 쟁취한 사람이야 방법을 찾았으니 비슷한 방법으로 더 많은 걸 얻는 방법을 이어갈 수 있고, 피해를 본 사람은 빼앗겼으니 딛고 일어설 힘을 잃어버린다. 이렇게 지식과 기술에 초점을 둔 교육은 사회를 극과 극으로 갈라 결국 붕괴의 길로 인도한다.

무너지는 사회를 막는 사람들은 지식인이 아니다. 생각을 통해 원인과 근거를 찾아가는, 즉 인과의 법칙을 찾아가는 사람들이다. 자연현상을 이해할수록 기존의 자연현상에 대한 지식의 틀을 무너뜨린다. 지구가 편편하다고 주장했던 지식의 틀이 무너진 과정이 여기에 해당한다. 인간의 삶에 대한 고찰도 마찬가지다. 기득권의 주장이 인간다움에 대한 새로운 해석으로 인해 무너지며 사회는 바뀌어 왔다. 이렇게 새로운 영역을 탐구하고 찾은 사람들이 인류의 역사를 바꿔온 주인공들이다. 나머지는 그저 이들이 남긴 지식을 배우고 익히며 해석해서 도구로 만들어 사용하는 정도에 그친다.

물론 새로운 현상을 탐구하고 찾아가는 사람들도 기존의 사회를 무너뜨리는 역할을 한다. 지식으로 형성된 사회구조를 붕괴시키고, 권력과 재력으로 형성된 피라미드를 근본부터 흔든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기득권층에서 반길 수 없는 것도 사실이다. 자기들의 주장이 받아들여지지 않고 오히려 공격당하는데, 밀어내는 게 당연하다. 지구가 편편하다고 주장하면 그 내용을 가르치는 사람들에게 지구는 둥글다는 주장을 하는 학자는 말 그대로 입을 막아야 하는 적이다. 숙청과 마녀사냥으로 새로운 길을 가는 사람들을 사회로부터 밀어냈던 이유도 여기에 있다. 

이렇게 기득권은 새로운 세계를 탐구하는 사람들을 두려워한다. 

숙청과 마녀사냥은 기득권이 자기의 자리를 지키기 위한 몸부림이다. 타인을 논리적으로 설득할 수 없으니 근거 없는 비난과 없는 이야기를 만들어 죽이고 가두는 행위다. 그런데 이런 행위가 현대에는 차별과 비하로 바뀌어 나타난다. 인종이 다르다고 차별하고, 국적이 다르다고 차별한다. 성별로 사람을 나눠 싸움을 부추기며, 장애인을 비하한다. 이 모든 현상은 인간이 아닌 사람의 탈을 쓴 동물의 모습이다.

교육은 두뇌 발달을 위해 존재한다. 싸움과 갈등이 아닌 생각의 힘을 경쟁하는 새로운 세계는 교육이 바뀌어야만 가능하다. 그래야 양극화가 아닌 많은 사람이 함께 어울려 살아갈 수 있는 사회가 만들어 질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