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끔 가수의 공연을 방송으로 본다. 공연을 하는 가수가 외치는 모습도 보인다. ‘여러분, 즐겁습니까?’, ‘여러분 행복합니까?’ ‘저도 행복하고 즐겁습니다!’라는 취지의 말을 외친다. 관객과 가수가 하나가 되어 즐기는 공연장의 모습이다. 그런데, 정말 그럴까? 가수와 관객이 하나가 되어 행복과 즐거움을 나누고 있는 걸까? 현실은 그렇지 않다. 동상이몽이라는 말처럼, 이 둘 사이에는 커다란 벽이 존재한다. 이제부터 행복과 즐거움의 차이를 깊이 있게 살펴보자.
가수가 공연할 때 그냥 무대에 올라 노래하면 되는 걸까? 연기자가 연극에서 역할을 맡아 공연하면 그저 맡겨진 역을 연기하면 되는 걸까? 운동선수가 경기에 나설 때 준비 없이 경기에 참여하면 되는 걸까? 답은 이미 나와 있다. 이들은 모두 무대에 설 때까지 피나는 노력과 연습의 과정을 겪은 사람들이다. 때로는 노력과 연습만으로도 부족하다. 선택과 검증을 거쳐야 한다. 실력을 겨뤄 이겨야 무대나 경기장에 설 수 있다. 노력과 연습의 결정체인 무대나 경기장에 설 때 이들의 가슴은 벅차오를 것이다. 그동안의 투자가 결실을 보는 시간인데 단순할 수 없다. 그런데 관객도 같을까?
가수의 행복과 즐거움은 관객의 그것과 같지 않다. 일단 가수는 행복과 즐거움을 위해 인고의 과정을 거쳤다. 물론 그 인고의 과정마저 즐거운 시간일 수 있다. 하지만 이는 노력이 결과로 나타났다는 조건이 전재한다. 결과가 좋지 않으면 인고의 과정도 쉽지 않은 시간이 되기 때문이다. 그런데 관객은 어떨까? 공연을 보기 위해 얼마나 노력하고 연습했을까? 공연 티켓을 사기 위한 시간, 공연에 대한 기대감, 공연에서 즐길 시간에 대한 두근거림 말고 무엇이 더 있을까? 답은 나와 있다. 가수가 느끼는 행복과 즐거움은 관객이 느끼는 행복과 즐거움하고는 차원이 다르다. 그런데 여기서 끝이 아니다. 가수와 관객 사이에는 결코 좁힐 수 없는 거리가 있다.
가수가 노력하는 이유가 뭘까? 노래로 자신을 비롯해 듣는 사람을 위로한다고 주장하는 이들은 청취자에게 자신들의 의도를 전달해야 한다. 단순히 노래만 한다고 되는 게 아니라는 뜻이다. 운동선수도 마찬가지다. 노력만 한다고 될 일이 아니다. 관객이 기대하는 결과를 만들어야 한다. 축구 선수라면 골을 넣는 데 기여하든 골을 먹지 않도록 막아야 한다. 이런 결과를 만들기 위해 노력하고 훈련해야 한다. 하지만 관객은 다르다. 가수나 운동선수가 만들어 가는 결과물에 열광할 뿐이다. 즉 가수는 관객이 위로받고 행복할 수 있도록 노력하는 반면, 관객은 가수를 통해 행복과 위로를 받는다. 완전히 정반대의 모습이다.
같은 공연장에서 같이 숨을 쉬고 같이 춤추는 데 무대 위의 사람과 객석의 사람이 극과 극에 놓인 상황에서 모두 함께 행복과 즐거움을 느낀다. 이런 모순은 어디서 오는 걸까?
사람들 사이 느끼는 감정은 같아 보여도 그 근원은 완전히 다른 경우가 많다. 가수의 경우는 노력이 열매를 맺을 때 행복과 즐거움을 느끼지만, 관객은 가수의 노력이 없으면 노래를 통해 행복과 즐거움을 느낄 수 없다. 달리 말하자면 가수는 사람들이 행복과 즐거움을 느낄 수 있도록 방법을 찾고 노력하지만, 관객은 가수가 들려주는 노래가 없으면 행복과 즐거움을 느낄 기회가 없다는 뜻이다. 이렇게 행복과 즐거움이라는 감정에도 종류가 있다. 그런데 이런 모순이 단순히 운동경기장이나 공연장에만 존재할까?
직장인들은 직장에서 열심히 일한다. 사람에 따라서는 일에 진심인 경우가 있어 일하는 시간이 즐거울 수 있다. 하지만 많은 사람들은 때로는 하기 싫어도, 힘이 들어도 일을 한다. 대신 일한 대가를 받으면 그걸로 자기가 원했던 가수의 공연을 보거나 여행을 다니면서 즐거움과 행복을 느낀다. 이런 상황을 어떻게 해석해야 할까? 가수는 자기의 일을 통해 즐거움과 행복을 느끼는데, 관객은 일을 통해 즐거움과 행복을 얻지 못해 가수의 공연장을 찾아 힘들게 일한 대가로 받은 돈을 써가며 행복과 즐거움을 찾는다. 어디서 이런 차이가 시작된 걸까?
인간으로 태어나 자기 자신이 주체가 되어 살아가는 삶은 어렵고도 험난한 길이다. 적어도 자기 스스로 노래하는 방법을 찾고 시도한다면 공연에 있어서는 자기가 주체가 되어 살아가는 삶이 있다고 볼 수 있다. 공연에 자기의 생각이 담겨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또한 쉽지 않다. 본인의 생각으로 공연을 계획하고 실행한다면 책임도 본인의 것이 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스스로 멍석을 깔고 공연을 하기보다는 깔아놓은 멍석에서 춤을 추는 걸 선택하기도 한다. 적어도 내가 멍석을 깔지 않았기에 책임에서 어느 정도는 자유로울 수 있다. 그런데 관객은 이마저도 없다. 멍석도 깔려있고 춤을 추는 사람도 따로 있다. 관객은 그저 즐겁고 행복한 시간을 보내면 된다. 주인이 던져주는 맛있는 간식을 받아먹는 시간을 즐기는 강아지의 삶과 다르지 않다는 뜻이다. 이런 삶을 자기가 주인이 되어 살아가는 삶이라고 볼 수 있을까?
인간의 사고는 뒤집어져 있다. 행복하고 즐거운 삶을 살아간다고 생각하지만, 실제로는 잘 길들여진 애완동물의 삶을 살아가면서 그 삶이 행복이고 즐거움이라고 착각하며 살아가고 있다. 그러면서도 무의식적으로 노력과 인내의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을 비하한다. 현재 보이는 결과가 없다고 손가락질한다. 대기업에 취업했다고 어깨에 힘을 주고 다니며 거리에서 힘들게 영업하는 사람들을 비하하고, 일류대학에 입학했다고 다른 학교 대학에 다니는 학생들을 무시하는 행동이 여기에 뿌리를 두고 있다. 우물 안의 개구리가 자기의 상황은 보지 못하면서 우물 밖의 개구리를 손가락질하는 모습이다. 이렇게 손가락질하고 돌아서면 아무리 둘러봐도 갈 곳 없는 우물 안이니 답답하고 우울할 수밖에 없는 삶을 살면서도 벗어날 생각조차 하지 못한다.
이제부터라도 가수가 들려주는 노래에 행복과 즐거움을 얻는 삶이 아닌 내가 주체가 되어 행복과 즐거움을 만들어가는 삶을 살아야 하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