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동필 박사와의 일문일답] – 중도 (방법)은 결과가 아닌 사고의 과정

중도라는 개념이 미래를 논리적으로 예측하는 두뇌능력과 관련이 있다고 하셨는데 그 이야기를 이어갈 수 있을까요?

전제조건을 먼저 하나 이야기하고 계속할게요.

어떤 전제조건인가요?

여기서는 중도라는 개념을 미래를 논리적으로 예측하는 것과 연결해서 이야기하지만 이것은 한 예일 뿐이고 사실은 사고과정 그 자체를 이야기한다는 것을요. 미래를 예측하는 두뇌능력과 연결해서 설명을 했을 때 사람들이 조금 더 쉽게 이해할 수 있기 때문에 이것을 예로 드는 것이지 미래에 대한 논리적 예측에만 적용되는 개념이 아니라는 점을 짚고 넘어갈게요.

. 이야기를 먼저 들어보고 질문이 있으면 제가 질문을 할게요.

앞서 예를 들어 이야기한 코로나 바이러스를 계속 이어가 볼게요. 미래를 예측하는 두뇌능력의 관점에서요.

잊고 있었네요. 코로나 바이러스에 대한 민 박사님의 예측이 빗나간 것 아니냐는 이야기로 시작했었죠? 민 박사님은 그 때의 예측은 여러 가지 중 하나만을 언급한 것이라고 했고요.

맞아요. 지난 주 발표된 논문에는 몇 가지 예측을 조금 더 구체적으로 적었는데 그 중에서 하나를 가지고 설명하죠.

어떤 예측인가요?

바이러스는 숙주의 분포와 밀집된 정도, 즉 밀도에 따라 어쩌면 독성과 감염력이 함께 증가할 수 있다는 예측이었어요.

감기처럼 독성이 줄고 감염력이 늘어나는 방향이 아닌 완전히 반대의 경우가 될 수 있다는 뜻인가요? 그 원인으로는 인구의 밀도가 영향을 미친다는 뜻이고요?

. 왜냐하면 숙주가 많은데 굳이 독성을 줄일 이유가 없잖아요. 또 숙주가 많은 만큼 더 빠르게 전파할 수 있도록 변이가 일어날 가능성도 높고요.

가능성한 이야기인 것 같네요. 인류에게는 또 다른 큰 숙제 하나가 남겨지는 셈이겠지만요. 그러면 이것이 중도와 어떤 관계가 있나요?

지금까지 뉴스를 보면 코로나가 감염력과 독성이 함께 증가했을 가능성이 상당히 높아 이 예측이 맞았을 가능성이 있지만 이 가능성을 처음 생각하며 논문의 내용에 포함하려 생각했을 때만해도 말 그대로 주어진 조건을 바탕으로 가능성을 이야기 했을 뿐 결론이 어떻게 나오게 될 것인지에 관한 정확한 근거는 없었거든요.

결론이 확실하게 나지 않은 이상 가설은 말 그대로 가능성일 뿐이었을 테니까요. 그런데 결과로 확인되지 않은 가설이 가진 힘이 얼마나 될까요?

언뜻 보면 가설일 뿐이기에 아무 효력이 없어 보이죠. 그리고 결과가 없으니 타인에 대한 설득력도 크지는 않겠죠? 하지만 한 개인의 두뇌능력을 발달시킨다는 관점에서 보면 완전히 달라요.

어떻게 다른가요?

가설이라는 것은 정해진 것이 없기 때문에 모든 가능성을 열어놓고 생각을 하죠. 때문에 맞고 틀림이 없어요. 또 모든 가능성을 열어놓는 다는 것은 이것은 이렇다!’라고 결정된 것이 없기 때문에 모든 변수를 받아들일 수 있는 준비가 되어있다는 뜻도 포함하죠.

충분히 그럴 것이라고 생각해요. 결론을 바탕으로 생각한다는 것은 이미 결과가 있기 때문에 그것에 갇혀 흑/백으로만 생각할 수 있는 반면, 결론이 내려지지 않은 가설의 경우에는 경우의 수가 늘어날수록 가설이 바뀔 수 있고 그 과정에서 점차 미래를 정확하게 예측할 수 있는 두뇌능력이 발달할 수 있다는 뜻으로 들리는 데 제 설명이 지금까지의 이야기와 부합하나요?

. 그래서 중도 또는 방법은 말 그대로 공부를 할 때 그 어디에도 치우침이 없이 사고할 수 있도록 기준을 잡는 공부 방법의 하나예요. 공부를 하는 도중 맞다/틀리다의 벽에 부딪히면 사고의 과정이 중도를 벗어난 것이라고 확인할 수 있으니까요.

한 마디로 내 공부방법이 사고력에 초점을 맞춘 것인지 아니면 지식에 매달려가는 것인지를 검증을 하는 방법의 하나로 중도라는 개념이 사용된다는 뜻이군요. 그러면 앞서 공자나 맹자 등의 성인은 착한 일/나쁜 일을 구분했지만 석가모니나 예수는 그렇지 않았기 때문에 이러한 성인들의 수준을 넘어섰다고 하셨잖아요? 그러면 여기서의 중도는 무엇인가요? 중도를 공부방법의 하나라고 본다면 연결고리가 만들어지지 않는 것 같거든요.

그렇지 않아요. 같은 맥락에서 연결할 수 있어요. 이런 예를 들어볼게요. 이건 실제로 인터넷으로 저와 글을 주고받았던 사람과의 이야기인데 한 사람이 자신은 고기를 먹는 사람들이 너무나 미워서 분노가 가시지 않는다고 이야기했어요. 그래서 제가 답을 했죠. 그 미움이 결국 고기를 먹어도 된다/먹으면 안 된다라는 자신의 생각에서 비롯된 것 아니냐고. 그러니까 고기를 먹으면 안 된다는 내 생각으로 타인을 판단하는 것 때문에 스스로 힘든 삶을 살고 있는 것 아니냐고요.

듣고 보니 그런 것 같네요. 많은 일상의 분노와 짜증이 내 판단을 상대가 받아들이지 않기 때문인 것 같아요. 담배를 피우는 사람에게 담배를 줄이거나 끊으라고 잔소리해서 싸움이 벌어지는 경우, 부모가 자녀들에게 공부하라고 강요하다보니 자녀와의 갈등이 심해지는 경우 등 많은 갈등이 자신의 판단으로 타인을 움직이려 할 때 발생하는 것 같네요. 그런데 자신의 판단이 없으면 접근할 수 있는 방법이 없지 않나요? 판단을 내리지 않는다는 것은, 내 생각이 없는 것과 다르지 않아 보이거든요.

인간의 두뇌가 많이 발달한 것 같지만 결과와 같이 주어지는 자극이 없으면 무엇인가를 스스로 생각할 수 있는 방법을 찾지 못하는 현실을 보면 아직 스스로 움직이는 단계까지는 이르지는 못한 것 같죠? 뒹굴 거리며 심심해서 미칠 것 같다며 답답해하는 경우를 봐도 알 수 있고요. 중도라는 개념을 볼 수 없는 또 다른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어요. 중도는 판단을 내리기 전의 과정인데 결과가 있어야만 두뇌가 움직이니 중도를 볼 수 없는 거죠.

조금 복잡한 것 같아 정리를 하고 넘어갈게요. 중도는 결론을 내리기 전 단계의 사고과정이라 결과가 없는 상태이고 그렇기 때문에 맞다/틀리다와 같은 판단도 없는 상태라는 뜻인 것 같은데 그러면 어떻게 사람들과의 관계를 이어가나요? 사람들과 대인관계를 이어가려면 결론이 있거나 판단을 내려야 가능한 것 아닌가요?

바로 그 차이가 공자, 맹자 등의 성인들과 예수와 석가모니의 차이라고 봐야겠죠. 원수를 사랑하려면 원수라는 판단이 없어야 가능하고 간음한 여인을 체벌로부터 자유롭게 하려면 간음에 대한 판단이 없어야 가능하겠죠? 살인을 한 사람을 대할 때에도 살인자라는 판단을 내리고 바라본다면 자비라는 개념은 존재할 수 없겠죠?

물론 살인을 한 사람도 자비로 품을 수 있으려면 저 사람은 살인자다!’라는 판단이 없어야 가능할 것 같기는 한데, 인간으로서 판단이 없다면 무엇으로 살아갈 수 있을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