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동필 박사와의 일문일답] – 성인을 넘어선 지도자 1

◆ 사실 앞서서도 계속 이야기 했지만 원하는 것을 이루고자 하는 목표 지향적 두뇌능력도 쉽지 않은 것이 현실이잖아요. 방송에서 보면 예를 들어 요식업으로 성공하기를 바라는 사람들은 많은 것 같은데 실제로 성공하는 사람들은 그렇게 많지 않은 것을 보면 쉽지 않은 정도가 아니라 상당히 어렵다는 생각이 들어요. 그런데 이보다 더 발전한 두뇌능력이 목표가 없이도 사고를 이어가면서 목표를 만들어 낼 수 있는, 즉 무에서 유를 창조하듯 목표를 스스로 만들어 낼 수 있는 두뇌능력이라고 하셨고 이러한 두뇌능력은 인류 역사에서 손에 꼽을 정도로 적고 또 이러한 두뇌능력을 지닌 지도자들은 성인으로 알려져 있는 경우도 있다고 하셨잖아요? 물론 성인이라는 개념이 사람들을 이끄는 능력을 지닌 지도자를 포함하는 것 같아 이해는 갈 것 같은데 석가모니나 예수의 경우는 어떻게 다른가요? 일반적으로 석가모니와 예수도 성인으로 생각하는 경우가 많은 것 같거든요. 

– 공자, 맹자, 노자와 같은 사람들이 남긴 내용을 보면 도덕과 효가 있고 충성이 있죠? 

◆ 그렇죠. 그거야 노자의 도덕경만 봐도 알 수 있으니까요. 

– 그러면 간음을 한 여인의 경우에는 도덕적으로 잘못된 행동을 한 것이겠죠? 또 살인을 한 사람도 도덕뿐 아니라 법에도 어긋난 범죄를 저지른 것이고요? 

◆ 예수가 간음한 여인에게 돌을 던지려던 사람들을 돌아서게 하고 석가모니가 살인을 한 사람도 살인을 멈추게 했다는 이야기를 하시려는 것 같은데 그것이 노자와 같은 성인들과 어떻게 다르다는 것인가요? 

– 노자나 공자와 같은 사람들에게는 ‘옳다/그르다’ ‘도덕적이다/아니다’와 같은 개념이 있지만 석가모니와 예수의 경우에는 그러한 것을 넘어섰다는 것이 차이겠죠.  

◆ 앞서 이야기 하신 것처럼 ‘맞다/틀리다’ 또는 ‘이건 이거다/저건 저거다’의 경우에는 결론을 내리고 그 결론에 따라 판단을 하는 두뇌능력을 말하는 것 같은데 이렇게 결론을 내리지 않고 사고를 이어갈 수 있는 방법을 석가모니나 예수는 할 수 있었다는 뜻인가요? 그러한 사고는 어떤 사고력인가요? 짐작이 어려운데요. 

– 일단 예수에 대해서는 제가 알고 있는 것이 별로 없고 또 기적을 행한 기록이 많아 논리적인 설명을 벗어나는 경우가 많으니 석가모니의 가르침 중 해석이 분분한 것을 가지고 이야기를 이어가볼게요. 석가모니의 중도에 대한 이야기를 들어보셨죠? 

◆ 예, 들어봤죠. 어느 쪽에도 치우치지 말라는 뜻으로 알고 있어요. 

– 그러면 그 이야기를 그대로 받아들여서 생각해볼게요. 만일 어떤 생각에 ‘맞다/틀리다’가 있다면 이것을 중도라고 할 수 있을까요? 

◆ 없죠. 그래서 옳고 그름도 없어야 한다고 이야기하는 사람들도 봤어요. 나아가 이런 사람들도 ‘이것은 좋은 일이다!’, ‘선이 없을 때에는 차악을 선택하면 된다!’와 같이 자신의 주장을 펼칠 때에는 좋고 나쁨을 바탕으로 이야기 하더라고요. 그래서 중도라는 개념이 존재한다는 것 자체가 가능하기는 한 것인지 의문이 들 때가 많아요. 

– 그것은 중도의 개념을 지식으로 해석해서 벌어지는 현상이에요. 

◆ 지식으로 해석했다는 말은 무슨 뜻인가요? 

– 중도를 옳고 그름의 중간으로 해석하는 것이죠. 

◆ 잘 이해가 가지 않는데요. 

– 예를 들어 설명해 볼게요. 여기 두 사람이 있어요. 그런데 둘이 냉전 상태예요. 이런 상황에서 제 3자로서 중도를 선택한다는 것은 무엇을 뜻할까요?  

◆ 그거야 당연히 어느 쪽 편도 들어주지 않는 것이겠죠.

– 어느 쪽 편도 들어주지 않을 수 있는 방법은 무엇일까요? 

◆ 글쎄요. 그냥 둘이 싸우도록 내버려두는 것 아닐까요? 아니면 양쪽의 이야기를 모두 들어주는 정도요? 

– 만일 어느 쪽도 편들지 않으면 두 사람은 나를 어떻게 생각할까요? 

◆ 서로 관계가 친밀하다면 갑자기 멀어지지 않을까요? 나와 친하다고 생각했는데 내 편을 들어주지 않으면 서운할 것 같아요. 반대로 어느 한쪽의 이야기를 들어주면 다른 한쪽이 화를 낼 테고 둘 다의 이야기를 들어주면 박쥐와 같이 여기 붙었다 저기 붙었다 한다고 양쪽에서 눈치를 주지 않을까요? 어쩌면 그냥 내버려 두는 것이 가장 현명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드네요. 

– 그렇겠죠. 꼭 갈등구도에 끼어있는 상황이 아니더라도 이와 비슷한 일은 많겠죠? 예를 들면 부모가 아이의 공부에 간섭하는 것도 아이가 공부를 잘 했으면 하는 생각에서이니 공부를 ‘잘해야 한다!/못해도 괜찮다!’ 중에서 잘해야 한다는 선택했기 때문에 벌어지는 일이죠. 따라서 중도를 선택하면 굳이 아이에게 공부하라고 잔소리를 할 이유가 없겠죠? 

◆ 생각해보니 그러네요. 배우자 사이의 갈등, 가정불화, 직장에서의 알력 등 사회의 모든 현상들이 흑백으로 나눈 판단으로 인해 발생하는 것으로 보이네요. 그런데 중도를 지킨다고 한다면 어느 쪽도 편을 들거나 선택하면 안 되는 것이니 그냥 가만히 있으면 되는 건가요? 

– 인간이 살아가면서 아무 선택도 하지 않고 살아갈 수 있을까요? 

◆ 아니요. 그건 불가능할 것 같아요. 하다못해 내 삶을 유지하는 최소한의 선택도 선택이잖아요. 내가 쌀 한 톨 고기 한 점을 먹는 다는 것 자체가 생명을 이어갈 수 있는 식물과 동물을 죽이는 것과  다르지 않으니까요. 이렇게 따지자면 중도라는 개념은 존재할 수 없는 개념이 아닌가요? 

– 앞서 이야기 했듯 중도라는 개념을 볼 수 없는 이유는 중도를 중간 또는 치우침이 없는 것 등 지식으로 바라보기 때문이에요. 

◆ 그러면 다른 관점은 무엇인가요?

– 사고의 과정 또는 사고를 이어가는 방법의 관점에서 중도를 봐야하는 것이죠. 

◆ 사고를 이어가는 과정이나 방법으로서의 중도라고요? 혹시 방법론이라는 것도 여기서 나오는 이야기인가요? 예전에 들었거든요. 

– 예, 둘 다 같은 뿌리에서 자란 것으로 볼 수 있어요. 두 가지 개념이 다르지 않거든요. 

◆ 아직도 잘 이해가 가지 않는데 조금 더 쉽게 설명해 주실 수 있을까요? 

– 그러면 현재 가장 이슈가 되는 코로나 바이러스에 대한 내용을 가지고 이야기를 해 볼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