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육의 근본

위키피디아에 의하면 교육은 ‘사람이 살아가는데 필요한 지식이나 기술 등을 가르치고 배우는 활동’으로 정의되어있습니다. 현재의 교육체제를 보면 이 정의가 잘 내려진 것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이러한 교육체제 속에서 학생들은 다양한 과목을 배우며 익혀서 후에 사회생활에 적용하게 됩니다. 그렇지만 이렇게 내려진 정의가 진정 교육의 전부일까요? 현 사회 속에서 많은 사람들이 교육의 필요성을 강조하지만 또 다른 한편으로는 현재의 교육이 어딘가 부족하고 무엇인가 잘 맞지 않는 부분도 있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이 ‘교육의 근본’ 글을 통해 진정한 교육이 무엇인지를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삶 그 자체

교육은 아이가 세상에 태어나는 순간부터 시작됩니다. 부모는 아이에게 필요한 것을 보여주고 아이는 이러한 부모의 모습을 보고 살아가는 법을 배우기 시작합니다. 서로가 배우고 가르치는 것을 인지하던 하지 못하던 그 아이가 자라나는 과정 속에서 첫 단계의 교육이 이루어지게 됩니다. 그러나 집에서의 교육만으로는 아이들이 살아가는데 필요한 것을 모두 채워줄 수 없습니다. 부모들이 아이들을 가르칠 수 있는 부분은 부모들 수준까지이기 때문입니다. 즉, 부모들은 부모들의 수준까지만 아이들을 가르칠 수 있지 그 이상을 가르치지는 못합니다. 그렇기에 부모는 학교로 눈을 돌립니다. 학교를 통해 다양한 과목을 배우고 활동을 하면서 아이가 더 많은 것을 배우고 익히기를 바랍니다. 그러나 학교 또한 한계가 있습니다. 선생님들은 선생님들 수준 이상을 학생들에게 가르치지 못 합니다. 이런 이유로 부모들은 가능한 더 좋은 학교에 보내려 애를 씁니다. 더 좋은 학교에서는 상대적으로 단계가 높은 교육을 받을 확률이 높아지고 또 후에 사회에서 내가 원하는 직장을 잡을 확률이 높아지기 때문입니다. 여기까지가 부모나 사회의 관점에서 볼 때의 교육이라 할 수 있습니다. 즉 부모나 사회가 결정해서 자녀에게 제공할 수 있는 교육인 것입니다. 그렇지만 아이들의 경우에도 교육을 같은 관점에서 바라볼까요?

현재의 교육체제 속에서 교육을 받아야하는 아이들의 경우에는 그 보는 관점이 조금은 다를 수 있습니다. 아이들에게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은 주어진 교육과정을 잘 마쳐서 후에 사회의 한 사람으로서 원하는 삶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주어진 교육과정을 잘 마치기위해서 아이들은 목표를 세우기 시작합니다. 목표는 성적이 될 수 도 있고 운동이 될 수도 있습니다. 이렇게 목표를 세우고 그것을 이루는 과정에서 아이들은 성취감을 얻게 되고 또 이러한 성취감을 맛봄으로써 더 큰 목표를 세우고 달려가게 됩니다. 그런데, 이 목표와 성취감을 통한 배움에는 보이지 않는 함정이 하나 있습니다. 초등학교, 중학교, 그리고 고등학교까지는 대부분의 학생들이 주변에서 옵니다. 즉, 우리 주변에 있는 공부, 음악, 미술, 또는 운동 등 다양한 재능을 가진 학생들이 한 교실 또는 한 학교에서 공부를 합니다. 다양한 재능을 가진 아이들이 한 곳에 모여 있기에 각 분야에서 목표를 이루기가 쉬워집니다. 공부를 하겠다고 하는 학생들은 조금만 공부하면 반에서 순위가 쉽게 올라갈 수 있습니다. 운동을 잘하는 학생은 조금만 노력하면 다른 학생들보다 더 잘 하게 됩니다. 즉 각자가 세운 목표를 성취할 수 있는 확률이 상대적으로 높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아이들이 대학교에 진학하고 나면 이야기는 조금씩 바뀝니다. 대학부터는 운동, 예술, 또는 공부 등에서 재능이 비슷한 학생들이 모였기 때문입니다. 즉, 이전과는 달리 수준이 비슷한 학생들이 모여 있기에 목표를 이룰 수 있는 확률이 줄어들었다는 것입니다. 목표를 이룰 수 있는 확률이 줄었다는 것은 실패할 확률이 더 높아졌다는 것과 같습니다. 이제는 성취감보다 좌절감을 맛볼 확률이 더 높아졌고 이 좌절감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학생들의 경우 몇몇은 극단적인 선택을 하기도 합니다. 그런데 성공보다 좌절의 횟수가 많아지는 것이 대학에서 끝나는 것은 아닙니다. 직장을 잡거나 개인 사업을 시작하거나, 모든 경우에 있어 성공보다는 실패의 확률이 더 커집니다. 왜냐하면 대학을 통해 한 번 더 속아져서 이제는 능력의 차이가 더 좁혀졌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이러한 상황을 어떻게 극복할 수 있을까요?

얻은 것을 얻었다고 하지 않고 이룬 것 또한 이룬 것이라 하지 않는다.

위의 경우 한가지 해결책은 있습니다. 흔히들 이야기하는 성취감에 휩싸이지 않는 것입니다. 즉, 목표를 이룬 것도 이룬 것이라 생각하지 않고 노력을 통해 얻은 것이 있어도 얻은 것이라 생각하지 않는 것입니다. 스스로 이렇게 훈련을 하면 성취감에 도취되지도 않게 될 것이고 더 나아가서는 목표를 이루지 못해도 좌절감에서 오래 머무르지 않을 수 있게 됩니다. 그렇지만 이 방법도 완전한 해결책이 될 수 없습니다. 성취감에 도취되지 않는 것은 도움이 되지만 문제는 성취감이 없어지면 목표를 세울 이유가 사라집니다. 따라서 전에는 목표를 향해 노력을 했기에 하기 싫은 것도 참고 했었지만 목표를 세울 이유가 없어진 상태에서는 하기 싫은 것이 생기면 할 이유도 없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전에는 성적을 올리겠다고 힘이 들어도 참고 공부했던 학생이 이제는 재미있는 과목만 공부하고 재미없는 과목은 공부하지 않는 경우가 생기는 것입니다. 위의 상황을 정리해보면 목표를 세우는 것도 세우지 않는 것도 모두 장단점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이 두 가지 상황을 모두 해결할 수 있는 방법이 있을까요?

사람에게 주어진 가장 큰 즐거움 – 생각

사람에게 주어진 가장 큰 즐거움은 생각을 하는 것입니다. 자연은 각 생명체들이 자연에서 살아남는데 사용할 도구를 가장 재미있는 놀이로 제공해 주었습니다. 그렇기에 어린 사자의 경우 물고 할퀴는 놀이를 하면서 사냥의 기술을 배우면서 자라다가 어느 한 시점이 다가오면 부모가 사냥하는 모습을 보고 어려움 없이 따라할 수 있게 됩니다. 사람에게는 생각하는 능력이 자연이 제공한 자연 속에서 살아남는 도구입니다. 따라서 사람들은 생각을 할 때 가장 큰 즐거움을 얻게 되는 것입니다. 즉, 내가 무엇인가를 재미있어하고 즐기는 것이 있다면 그 무엇이 바로 내 뇌를 자극해서 생각을 할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해 주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컴퓨터게임을 예로 들어보겠습니다. 부모들은 컴퓨터게임을 문제로 생각합니다. 하지만 많은 아이들이 시간 가는 줄 모르고 게임을 하기도 합니다. 몸은 피곤하고 지치지만 게임을 그만두지 못합니다. 그 이유는 바로 이 컴퓨터게임이 아이들의 뇌를 자극해서 끊임없이 생각고 실험할 수 있게 만들기 때문입니다. 또한 한번 게임을 끝내면 아이들은 새로운 게임을 찾게 됩니다. 한번 끝을 낸 게임을 다시하게 되면 굳이 생각과 실험을 하지 않고도 쉽게 게임을 할 수 있으므로 흥미를 잃게 되는 것입니다. 운동을 하면 무엇인가 개운한 느낌을 얻는 것도 같은 이유입니다. 운동을 하는 동안 생각이 끊이지 않고 그렇기에 몸은 피곤해도 개운하게 느끼는 것이 그 이유입니다. 만약 어떤 사람에게 운동을 하는 대신 같은 양의 육체적인 노동 (예를 들어 삽으로 땅 파기)을 시킨다면 그 사람은 결코 운동을 한 후에 느끼는 그 느낌을 얻을 수 없을 것입니다. 이와 같이 사람들은 생활 속에서 생각을 할 수 있을 때 가장 큰 즐거움을 얻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대부분 스스로 생각하는 능력을 잃어버렸기에 외부에서 주어지는 게임, 운동, 또는 독서 등의 자극에 의존해야합니다. 이렇게 외부에서 오는 자극에 의존하다보니 그 자극이 없으면 생각을 할 수 없기에 답답함을 느끼기 시작합니다. 이때 나는 무엇인가 찾고자 하는 것이 있다고 느끼지만 찾을 수 없고 공허함만 생깁니다. 학교를 졸업하면 답이 있을 것 같은데 막상 사회생활을 시작해 보면 같은 자리를 맴도는 것 같기도 합니다. 또 사회에서 한 단계 한 단계 진급을 할 때마다 새로운 것을 찾을 수 있을 것 같지만 그 답을 얻을 수 없다는 것을 알게 되고 이로 인해 결국에는 현실이라는 보이지 않는 유리벽속에 갇혀 버리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지만 생각하는 능력을 다시 찾게 되면 그 보이지 않던 유리벽도 내 마음속의 벽이지 실제로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유리벽 속에 갇힌 것 같은 상태는 사회생활을 하는 어른뿐만 아니라 많은 사춘기의 아이들도 인지하지 못할 뿐이지 그렇게 느끼고 있습니다. 사춘기의 아이들은 이러한 정신적인 방황과 함께 몸의 변화도 함께 옵니다. 이렇게 정신과 몸이 함께 바뀔 시기에는 그 고통이 배로 다가오게 되는 것이고 그렇기에 부모에 대한 반항도 더 거센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부모들은 부모들의 기준에 아이들을 맞추려고 애를 씁니다. 여기서 많은 부모들은 한가지 인지하지 못하고 있는 부분이 있습니다. 그것은 보이지 않는 유리벽 속에서 벗어나지 못한 상태에서 아이들에게 부모의 기준을 강요한다는 것은 아이들도 그 보이지 않는 유리벽에 가두기 시작한다는 것과 같다는 것입니다. 바로 이 차이로 인해 아이들이 사춘기를 겪게 됩니다. 즉, 아이들에게는 생각할 수 있는 자극이 필요한데 부모는 그 자극을 제공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더 생각을 하지 못하도록 아이들을 묶어 놓는다는 것입니다. 나이가 들어 사회인이 되었을 때는 방황이라는 단어만 다른 사춘기와 비슷한 일을 겪게 됩니다. 그리고 그 사춘기나 방황이 극에 이르렀을 때 그 아이들이 그리고 그 사람들이 어떤 선택을 하게 되는지에 대해서는 모두 잘 알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아이들을 그리고 내 자신을 훈련시켜야 할까요? 어떻게 해야 아이들과 우리의 삶 속에서 ‘사춘기’ 또는 ‘방황’이라는 단어를 지울 수 있을까요? 답은 바로 교육에 있습니다.

말을 하기 이전의 아이들의 교육

언어가 발달하기 전의 아이들이 생각을 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방법은 아이들의 행동을 설명해주는 것입니다. 아이들이 하는 행동을 설명하고 그 행동의 결과를 연결시킴으로써 아이들의 생각이 발전하도록 도울 수 있습니다. 예를 들면, 아이가 우유를 마시면, ‘OOO이 우유를 마시고 있네!’, 또 아이가 우유를 마시다가 흘리면 ‘우유를 마시다 흘렸네, 여기 봐 우유가 바닥에 흘렀다.’와 같이 행동과 그 결과를 연결시켜 설명을 해 주면 아이의 두뇌는 원인과 결과를 연결시키는 사고를 시작하게 됩니다. 더 나아가서 아이가 말을 조금씩 알아듣게 되면 ‘우유를 쏟으니까 어떻게 됐지?’와 같이 질문을 통해 아이들이 사고를 자극할 수 있습니다.

언어를 습득한 아이들의 교육

언어를 습득한 아이들의 경우 질문이 많아지기 시작합니다. 누가 가르쳐주지 않아도 아이들은 자연스럽게 질문을 하고 또 스스로 탐구를 하기 시작합니다. 이 시기의 아이들은 ‘이건 뭐야?’ 또는 ‘하늘은 왜 파랗지?’와 같은 질문을 시작합니다. 아이들은 실제로 모르기 때문에 질문을 많이 합니다. 그러나 가끔은 아는 것도 질문을 합니다. 아이들이 질문을 하는 이유는 바로 묻는 순간 아이들의 뇌가 답을 찾기 위한 생각을 시작하기 때문입니다. 아는 것을 묻고 또 묻는 경우가 바로 이런 경우입니다. 생각을 하고 싶지만 아직은 알고 있는 것이 많지 않아 같은 질문이라도 하면서 생각을 하려고 하기에 알고 있는 것도 묻게 됩니다. 따라서 아이들은 스스로 생각을 하기위해 자꾸 질문을 던지는 것입니다. 문제는 아이들의 이러한 질문을 받을 때 부모들은 바로 답을 주거나 아니면 질문을 막아버린다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아이가 컵을 두고 ‘이건 뭐야?’ 라고 질문하면 대부분의 부모들은 ‘그건 컵이야’ 또는 조금 더 나아가서 ‘그건 물이나 우유를 담는 컵이야’라고 대답해 줍니다. 이렇게 단답식으로 답을 주는 경우에는 아이들에게 답은 주어도 생각할 수 있는 자극을 줄 수는 없습니다. ‘이건 뭐야?’라고 아이가 묻는 경우 아이가 생각을 계속해서 이어갈 수 있도록 자극을 주기위해서는 되물어야 합니다. 즉, ‘이건 뭘까?’ 그리고 ‘이 물건으로 무엇을 할 수 있을까?’ 아이가 무엇인가 생각을 하려고 질문을 했을 때 그리고 그 질문을 다시 질문으로 아이에게 되돌려 줄 때 아이의 두뇌는 자극을 받아 끊임없이 생각을 이어가게 됩니다. 또한 이때는 컵이라는 단어를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컵 자체가 생긴 이유와 용도를 생각하도록 아이의 사고를 유도할 수 있습니다. 이 부분은 상대적으로 쉽게 실행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대부분의 문제는 ‘하늘은 왜 파래?’와 같은 부모가 쉽게 대답할 수 없는 질문을 할 때입니다. 이러한 질문이 오는 경우 대부분의 부모는 답을 줄 수 없기에 질문을 하지 못하도록 아이들을 막습니다. 이렇게 질문을 하지 못하도록 막는다는 것은 바로 아이들이 생각을 하지 못하도록 만드는 것과 같습니다. 이렇게 생각을 막을 때 아이들은 반항이 심해지게 됩니다. 무엇인가 하고 싶은 것이 막히면 불만이 생기기 시작하고 그렇기에 반항을 하게 됩니다. 또한 부모가 아이들의 생각을 막기 시작하면 아이들의 질문 횟수도 함께 줄어듭니다. 따라서 이 시기에는 아이들의 생각을 늘려주도록 같이 질문하고 같이 답을 찾아야 합니다. 이렇게 되면 아이들의 질문의 수가 더 많아지게 되고 또 스스로 생각하는 시간을 제외하면 끊임없이 질문을 하게 됩니다. 아이들이 쉬지 않고 질문을 할 때가 바로 생각을 통해 가장 즐거운 시간을 보낼 때이고 나아가서 즐겁게 모든 것을 배울 수 있는 때 입니다. 또한 부모도 질문에 답을 주기보다는 같이 질문을 함으로써 아이와의 대화가 끊이지 않고 계속 진행할 수 있게 됩니다. 이렇게 되면 자녀와 문제가 생겼을 때 대화로서 쉽게 해결할 수 있게 됩니다.

10대 아이들의 교육

학교를 다니면서부터는 아이들에게 가정이 아닌 학교가 많은 부분을 차지하게 됩니다. 그러나 학교 교육은 여전히 아이들에게는 힘든 과정입니다. 너무 많은 지식을 전달하려다보니 수업시간에 아이들에게 생각을 할 수 있는 시간을 제공하지 못합니다. 따라서 부모가 아이들에게 학교 교육을 재미있게 받을 수 있는 방법을 알려주어야 합니다. 그 방법은 아이들이 학교에서 가지고 오는 숙제를 함께 생각할 수 있는 화두로 삼고 서로 질문하고 답을 찾으면서 하나씩 풀어가는 방법입니다. 이때 중요한 것은 아이들에게 질문하는 법을 함께 가르쳐주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학교에서 시계에 대해 배운다면 아이에게 ‘시계는 왜 생겼을까?’ 또는 ‘시간은 무엇일까?’ 등의 질문을 할 수 있도록 유도하면서 질문을 통해 답을 찾는 방법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또 나아가서는 학교 수업시간에 이러한 질문을 할 수 있도록 용기를 주면 아이들은 학교 교육에서 지루함을 덜 느끼게 될 것입니다. 이렇게 되면 아이들은 질문에 대한 답을 찾는 방법을 스스로 익혀가게 되고 그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지식을 쌓을 수 있게 됩니다. 나아가서 질문과 질문이 오고가는 대화는 지루하지 않고 재미를 느끼게 합니다. 따라서 부모와 아이들 사이의 대화가 단절되지 않게 됩니다.

대학 이후 아이들의 교육

고등학교를 졸업한 아이들의 경우 그리고 사회생활을 하는 사람들의 경우 대부분은 부모의 품을 벗어나 스스로 살아갑니다. 부모로부터 독립을 했다고는 하지만 대학 생활이나 사회생활 과정에서 점점 보이지 않는 벽에 부딪히게 됩니다. 무엇인가 답이 있을 것 같지만 그 답을 찾을 수 없고 가끔은 ‘내가 무엇 때문에 사는가?’라는 질문을 해 보기도 합니다. 대학을 졸업하면 내가 원하는 삶을 살 수 있을 것 같았지만 사회는 또 하나의 구속으로 다가오고 회사에서 진급을 하면 달라질 것 같던 생활도 달라지는 것 같아 보이지도 않습니다. 각 단계마다 그 단계를 나누고 있는 보이지 않는 유리벽이 느껴지고 그 벽을 깨기 위한 열심히 노력해서 하나를 깨고 올라서도 또 다른 유리벽이 느껴지는 상태가 반복됩니다. 이렇게 답을 찾아도 찾을 수 없고 보이지 않는 유리벽 속에 갇힌 것을 알지만 그 유리벽을 깨고 나올 수 없다고 느끼는 이유도 생각이 멈추었기 때문입니다. 이 경우에는 스스로 생각할 수 있는 능력을 찾아야만 합니다. 그 방법은 바로 모든 것에 대해서 질문을 하는 것입니다. 질문으로 하루를 보내도 지루하지 않던 그 어린 시절의 모습으로 돌아가서 보이는 것, 궁금한 것에 대한 질문을 던지는 순간 우리의 뇌는 다시 불이 켜지기 시작합니다. 즉, 질문은 우리의 뇌를 자극해서 생각을 할 수 있도록 만듭니다. 즉, 질문을 시작하면 아무리 단순한 주제라도 생각을 할 것들이 많다는 것을 알게 되며 그 질문에 대한 답을 찾아 가는 과정에서 우리는 지식의 범위를 넘어선 지혜를 쌓게 됨을 알 수 있습니다. 앞의 예에서처럼 시계를 생각해 보겠습니다. ‘시계’를 앞에 두고 생각을 한다고 가정해 보겠습니다. 많은 사람들은 시계에서 시침, 분침, 그리고 초침을 이야기 할 것입니다. 기계에 관심이 있는 사람들은 그 복잡한 구조에 대해 이야기를 하기도 합니다. 그렇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 단계에서 더 이상 진행하지 못합니다. 반면 생각을 할 수 있는 사람들은 질문을 던지기 시작합니다. ‘시간은 무엇인가?’, ‘왜 사람은 시간을 만들었을까?’, 또는 ‘시간의 기준은 무엇일까?’와 같은 근본적인 질문을 하게 됩니다. 이렇게 근본적인 질문을 함으로써 시간이 생긴 이유를 찾을 수 있게 됩니다. 즉, 지구의 자전 때문에 낮과 밤이 생기고 그 주기가 24시간이라는 것을 알게 됩니다. 또한 24시간이라는 것은 사람들 사이의 약속, 즉 상대적인 값이지 어떤 절대 값이 아니라는 것 등을 알게 됩니다. 바로 이렇게 생각을 하게 되면 모든 것을 근본에서 생각할 수 있게 됩니다. 근본에서 생각한다는 것은 바로 논리적인 사고를 말하는 것입니다. 논리적인 사고가 가능하면 세상의 흐름을 손바닥위에 놓고 볼 수 있게 됩니다. 우리에게 잘 알려진 이야기 중 ‘손오공이 재주를 부려봐야 부처님 손바닥’이라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즉, 세상의 많은 재주를 가진 사람이 그 재주를 다 부려도 논리를 바탕으로 모든 것을 바라보는 사람의 손바닥을 벗어나지 못하는 것 입니다. 근본 논리를 알고 그 논리를 통해 모든 것을 바라보는 힘은 흐르는 물과 같아서 그 무엇도 막을 수 없는 것입니다.

생각의 힘

그렇다면 생각한다는 것이 어떤 힘을 가졌을까요? 흐르는 물과 같이 그 무엇도 막을 수 없다고 말한 그 힘의 결과는 어떤 것일까요? 약 2300년전 에라토스테네스라는 철학자는 태양과 막대기 그림자로부터 지구의 둘레를 계산해 내었습니다. 그리고 그 오차는 현재 측정한 값과 약 4% 정도 입니다. 지구가 완벽한 구가 아님을 적용하면 4%의 오차는 오차라고 볼 수 없습니다. 우리가 학교에서 몇 년에 걸쳐 배우는 미분과 적분은 뉴턴이 한 나절 앉아서 만들어 낸 것입니다. 뉴턴은 이 공식을 수학을 공부하면서 만든 것이 아니라 데이터를 분석할 때 좀 더 정확하게 분석할 방법이 없을까 생각하다 만들어 낸 것입니다. 또한 우리가 잘 알고 있는 아인슈타인 그리고 그의 상대성 이론, 이 이론은 시간여행에 대한 개념을 만들어 냈고 우주의 현상을 설명하는데 기여를 했습니다. 같은 논문에 있는 수식은 원자력시대의 기초를 제공했습니다. 그렇지만 이 상대성 이론이 하나의 생각, 즉, ‘사람이 빛보다 빠르게 여행할 수 있다면 무엇을 보게 될까?’에서 시작되었다는 것을 아는 사람은 드믑니다. 이렇듯 역사속의 큰 획을 긋는 발견이나 발명은 논리를 바탕으로 한 현상의 관찰과 질문에서 시작되는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종종 이러한 생각의 힘을 천재나 영재와 같은 특정한 사람들의 능력으로 생각합니다. 그러나 생각할 수 있는 힘은 모두가 가지고 있습니다. 다만 그 것을 잃어버렸기에 보이지 않는 벽 속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어린 시절 질문을 하지 못하게 되면서 생각하는 능력을 잃기 시작합니다. 점점 그 능력을 잃어가다가 그 과정이 가속화 될 때가 바로 마음 (감정)에 의해 내 행동과 결정이 영향을 받기 시작할 때 입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생각하는 힘을 잃어버리기 시작하면서 그 보상작용으로 마음 (감정)에 의존하게 되는데 그 이유는 감정은 다른 사람과 공유할 수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생각하는 능력을 되찾는 데에는 두 가지가 함께 하여야 합니다. 첫째는 앞의 시계의 예와 같이 주제를 정하고 생각하는 훈련을 시작하는 것입니다. 시계라는 기계에 치우치는 질문이 아닌 근본적인 질문을 함으로써 시계가 생긴 이유와 왜 시계가 만들어 졌는지를 찾아보는 것처럼 주제에 대해 질문하고 또 질문하면서 답을 찾는 것이 첫 번째 방법입니다. 두 번째는 마음 즉 감정을 비움으로서 논리적인 사고를 방해하는 장벽을 없애는 것입니다. 감정이라는 것은 논리적인 사고의 측면에서 보면 모든 현상을 역으로 보게 만드는 역할을 합니다. 그렇기에 논리적인 사고가 진행이 되면 마음이 들어설 자리가 없어집니다. 즉, 감정에 치우치지 않기에 어떤 행동이나 판단에 있어서 논리를 바탕으로 하는 결정을 내릴 수 있게 되고 이러한 과정은 다시 한 단계 발전된 논리적인 사고를 할 수 있도록 도와줍니다.

우리는 지식이 아닌 지혜를 쌓는 교육이 더 필요하다는 것을 잘 압니다. 그렇지만 어떻게 해야 지혜를 쌓을 수 있는지 아는 사람은 많지 않습니다. 현 시대에서 지식의 범위는 한 사람이 감당하기에는 너무도 넓습니다. 이 넓은 부분을 다 가르칠 수 없기에 학교 교육은 세분화되어왔습니다. 그러나 그 근본에서부터 시작하면 수많은 다른 분야도 결코 다르지 않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배울 것이 끝이 없어 보여도 지혜가 쌓이면 그 모든 것이 하나의 진리에서 시작되었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세상의 이치를 지혜를 통해 알게 되면 아이들이 겪는 사춘기나 사회인들의 방황은 우리의 삶에 찾아오지 않게 되는 것입니다. 생각할 수 있도록 돕는 교육이 바로 진정한 교육의 근본이며 이러한 교육을 통하면 진정한 자유를 얻을 수 있습니다.